제05장 1803–1860
영토 확장, 노예제, 원주민 추방
미국의 국경이 서쪽으로 넓어질수록 토지와 노동, 주권을 둘러싼 갈등도 깊어졌다.
누군가에게 기회였던 영토 확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했을까?
존 가스트의 1872년 원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듬해의 판화. 철도와 전신을 따라 빛이 서쪽으로 번지고 원주민과 들소는 밀려난다. 팽창을 당연한 진보로 그린 시선 자체가 이 그림에서 읽어야 할 역사다.George A. Crofutt (cataloged print creator/publisher), after John Gast (painter of the 1872 original) · 소장처·원본 및 이용 안내
서쪽으로 넓어진 국경과 면화 경제
1803년 미국은 프랑스에서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지도에 그어진 국경이 바뀌었다고 원주민의 땅까지 정당하게 미국의 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원주민 국가는 이미 그곳에서 농사와 교역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고유한 정치 질서도 있었다. 백인 이주민과 토지 투기꾼은 새 농지를 원했고, 정부는 조약과 군사력을 이용해 이들의 진출을 뒷받침했다. 영토 확장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집단의 요구와 힘이 부딪친 과정이었다. 국경선의 확대와 주민의 동의는 같은 일이 아니었고, 미국 정부의 영토 주장과 원주민의 주권은 이후에도 충돌했다.
남부에서는 면화 수출이 늘면서 노예제도 함께 확대되었다. 영국과 미국 북부의 방직업, 상인의 유통망과 금융업은 노예 노동으로 생산한 면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1808년 해외에서 노예를 들여오는 무역이 금지된 뒤에도 국내 노예 거래는 계속되었다. 노예가 된 사람들은 남동부의 새 면화 지대로 강제로 팔려 갔고 가족과 헤어졌다. 이들은 노동을 거부하거나 탈출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등 여러 방식으로 지배에 맞섰다.
면화가 바꾼 경제와 사람의 이동
목화에서 씨를 골라내는 조면 기술은 생산 확대에 도움을 주었지만, 기계가 생겼기 때문에 노예제가 저절로 커진 것은 아니었다. 영국 방직업의 수요, 토지 취득, 대출과 운송, 노예 소유를 보장한 법이 함께 작용했다. 대농장주는 사람을 재산으로 평가해 거래와 금융에 이용했다. 국제 교역에서 수익을 얻은 북부 상인과 유럽 금융가도 이 체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산업혁명과 노예제는 ‘새로운 공장’과 ‘낡은 농장’이라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기대어 성장한 관계였다.
가족에게 이 경제의 확대는 강제 이별의 위험이었다. 어퍼사우스에서 딥사우스로 팔려 간 사람들은 경매와 이동을 거치며 기존의 친족 관계를 잃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을 기억하고 연락을 찾으며 새 공동체를 만들었다. 노예제 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자신의 경험과 연설·신문을 통해 노예 소유자가 그리는 질서정연한 농장 이미지에 맞섰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주장도 종교, 인권, 자유노동, 인종적 편견 등 다양한 동기에서 나왔다.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동등한 시민권을 지지했다고 볼 수는 없다.1
원주민의 주권과 강제 추방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서명한 원주민이주법은 남동부 원주민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내모는 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체로키인들은 헌법 제정과 청원, 소송으로 자신들의 주권과 땅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정부는 다수의 동의를 얻지 않은 조약을 근거로 추방을 강행했다. 1838~1839년 체로키인들이 겪은 ‘눈물의 길’에서는 이동과 수용, 정착 과정의 질병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생존자들은 서쪽에서도 공동체를 다시 세웠다.
추방은 누군가가 결정하고 실행한 정책이었다
체로키인들은 인쇄된 신문과 성문 헌법을 갖추고 미국의 법원에 호소했다. 그러나 미국식 제도를 받아들이면 땅을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조지아주와 연방정부, 토지를 원하는 백인 이주민의 이해가 그들의 주권과 충돌했다. 추방에는 법률을 만든 정치인뿐 아니라 군대, 운송 계약자, 토지 거래자도 참여했다. 사람들을 떠나게 한 뒤 그 땅을 누가 차지했는지를 보면, 이 정책이 단지 문화 차이나 두 집단의 오랜 불화에서 나온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2
미국의 영토 확대에는 국가 간 전쟁도 있었다. 텍사스는 멕시코에서 독립한 뒤 1845년 미국에 병합되었다. 국경을 둘러싼 분쟁과 팽창 의도가 겹치며 1846년 미·멕시코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 안에서도 전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승리 뒤 새 영토의 주민에게는 국적과 재산권, 언어와 정치 참여의 문제가 생겼다. 지도의 색이 바뀌었다고 생활이 같은 날 모두 바뀐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법과 권력 관계는 오랫동안 땅의 소유와 사람의 기회를 재편했다.
새 영토가 흔든 정치적 타협
1840년대 ‘명백한 운명’이라는 구호는 대륙 팽창을 정당화했다. 미국은 텍사스를 병합하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였다. 1848년 과달루페이달고조약으로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에 해당하는 넓은 땅을 얻었지만, 그곳은 빈 땅이 아니었다. 원주민과 멕시코계 주민은 새로운 지배 아래 토지와 권리를 지켜야 했다. 한편 새 영토에 노예제를 허용할지를 두고 의회의 세력 균형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졌다.
1820년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은 갈등을 잠시 봉합했지만, 노예제를 둘러싼 대립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강화된 도망노예법은 북부 주민에게도 노예제 집행에 협조하도록 요구했다.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법 이후에는 노예제 찬반 세력의 충돌이 유혈 사태로 번졌다. 1860년 노예제의 서부 확장에 반대하는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 지도자들은 제도의 장래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했다. 전쟁은 불가피한 결말이 아니었지만, 노예제를 지키려는 분리독립 선택이 위기를 전쟁으로 바꾸었다.
의회의 타협이 무너진 과정
미주리 타협은 자유주와 노예주의 수를 맞추고 일부 서부 지역의 노예제를 제한했지만, 그 제도의 정당성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은 주민이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원리를 내세웠다. 누가 주민으로 투표하고 결과를 집행할지를 둘러싸고 외부 세력까지 개입해 폭력이 번졌다. 노예제 문제를 각 지역에 맡기면 연방의 갈등이 사라진다는 기대는 무너졌다. 같은 시기 기존 정당 체제가 흔들리고 공화당이 서부로의 노예제 확대 반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3
1857년 드레드 스콧 판결은 자유주·자유 영토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자유를 요구한 흑인의 청구를 배척했으며, 아프리카계 사람의 연방 시민권과 의회의 영토 내 노예제 규제 권한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판결은 논쟁을 끝내기는커녕 더 격화했다. 1859년 존 브라운의 하퍼스페리 무기고 습격은 노예 소유자들의 공포를 키웠다. 링컨의 당선 뒤 남부 주들이 선택한 분리독립과 1861년 섬터요새 공격을 거쳐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금이나 지역적 기질을 원인으로 내세워 노예제의 중심성을 지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
역사가의 질문 · 추방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클라우디오 사운트는 원주민 추방을 미국 팽창의 당연한 부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연구를 소개하는 조지아대학교의 공개 설명은 추방의 결정과 실행을 역사적 문제로 다룬다. 이렇게 보면 지도자의 정책, 경제적 이익, 행정과 운송의 조직을 구체적으로 따질 수 있다. ‘결국 그렇게 될 일이었다’는 말 대신, 누가 어떤 대안을 버리고 누구에게 비용을 떠넘겼는지를 묻게 된다.2
아이티혁명과 대서양의 면화 경제
아이티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의 혁명과 저항은 프랑스의 카리브해 지배 계획을 흔들었고, 유럽 전쟁의 부담과 함께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매각하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영국 산업혁명의 방직공장은 미국 남부의 면화에 의존했다. 자유를 넓힌 혁명과 노예제를 키운 산업화가 같은 대서양 세계에서 맞물린 것이다. 미국의 팽창을 국내 정치나 개척 정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어떻게 이어졌을까
01 / 배경과 원인
새 농지와 면화 수익에 대한 욕구, 토지 투기, 정부의 팽창 정책이 영토 확보를 밀어붙였다.
02 / 사람들의 선택
매입과 병합, 전쟁, 원주민 추방으로 미국의 지배 영역이 넓어지고 새 영토의 노예제 허용 여부가 정치 쟁점이 되었다.
03 / 변화와 결과
원주민과 노예가 된 사람들의 강제 이동이 확대되고, 노예제의 장래를 둘러싼 남북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었다.
시간의 흐름
-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 주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 원주민이주법이 제정되었다.
- 체로키인의 강제 추방인 ‘눈물의 길’이 진행되었다.
- 멕시코전쟁과 과달루페이달고조약으로 미국이 서부의 넓은 영토를 얻었다.
- 링컨 당선 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인물과 장소
주요 인물
- 앤드루 잭슨
- 제7대 대통령. 백인 남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상징했지만, 원주민이주법에 서명하며 강제 추방 정책을 추진했다.
- 존 로스
- 체로키의 지도자. 청원과 외교로 추방에 반대했고, 강제 이주가 진행되자 주민의 생존과 공동체 재건을 위해 활동했다.
- 프레더릭 더글러스
- 노예 상태에서 탈출한 뒤 연설과 저술로 노예제의 폭력을 고발했다. 흑인을 수동적인 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 드러냈다.
주요 지명
- 루이지애나 매입지
- 현재의 루이지애나주만이 아니라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대한 매입 지역을 뜻한다. 프랑스와 미국의 거래가 원주민의 토지 권리를 없애지는 않았다.
- 인디언 준주
- 오늘날 오클라호마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 추방된 여러 원주민 공동체가 이주해 정착하고 정치 조직을 재건했다.
- 캔자스
- 노예제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1850년대 무장 충돌이 벌어진 준주. 서부의 문제가 전국 정치의 위기로 번진 공간이었다.
잠깐, 생각해 보기
정부가 다른 나라에서 영토를 샀다면, 그곳 주민의 땅과 정치적 권리도 함께 샀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을 돕는 해설
국가 사이의 영토 거래와 주민의 권리는 구분해야 한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프랑스의 영토 주장을 넘겨받은 거래였지, 원주민이 땅과 주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각주 · 연구와 사료
- 학회 연구사 해설Manisha Sinha / 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Eric Foner: Presidential Biography (AHA, 2000 biography).
포너의 『Free Soil, Free Labor, Free Men』이 노예제 확대 반대 안의 반노예제 사상과 인종적 동기를 함께 분석했다는 설명을 참조했다.
본문으로 ↑ - 역사학 연구 공개 해설University of Georgia Research / Claudio Saunt, UGA's Guggenheim fellows ask — and answer — difficult questions (2022; research discussion of Unworthy Republic (2020)).
원주민 추방을 다룬 사운트의 연구 주제를 확인했다. 책의 특정 쪽을 직접 인용하는 대신 공개 설명과 추방 관련 사료를 함께 읽었다.
본문으로 ↑ - 1차 사료 · 법률National Archives, Kansas-Nebraska Act (1854) (Milestone Documents).
주민주권 원리와 미주리 타협 제한의 폐기, 캔자스의 충돌을 확인하는 자료다.
본문으로 ↑ - 1차 사료 · 판결National Archives, Dred Scott v. Sandford (1857) (Milestone Documents).
당사자의 청구와 대법원 판단을 구분해 서술했다. 법원의 결정이 노예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사례다.
본문으로 ↑
이 장의 근거와 더 읽을 자료 · 5
- National Park Service — Trail of Tears: History & Culture
원주민이주법, 체로키 다수의 반대, 1838~1839년 추방과 공동체 재건. / Removal policy, Cherokee opposition, forced migration, and rebuilding. - National Park Service — Slavery as a Cause of the Civil War
노예제 확대 논쟁과 분리독립의 핵심 동기. / Slavery's expansion and its central role in secession. - National Archives — Treaty of Guadalupe Hidalgo (1848)
멕시코전쟁의 종결, 영토 양도와 주민의 권리 조항. / The treaty, territorial transfer, and provisions concerning residents' rights. - National Archives — The Louisiana Purchase Treaty on Display in St. Louis
1803년 매입과 아이티혁명·프랑스의 전쟁 부담의 연결. / The purchase in the context of Haiti and French wartime pressures. - Library of Congress — American Progress
1873년경 채색 석판화. LOC 권리 표시: No known restrictions on publication. / Chromolithograph, approximately 1873; no known publication restrictions.
본문은 아래 자료와 사료를 바탕으로 새로 집필한 입문 해설입니다. 연표는 주요 사건을 선별했으며, 그림은 제작자의 시각을 담고 있어 당시 현실 전체를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