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도미닉 크로산은 주기도문을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이상한 기도”라고 부릅니다. 그 말이 흥미로운 이유는 결론보다 질문의 방향에 있습니다.
크로산이 주목한 것은 단순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기도문을 드립니다. 모든 교회가 이 기도를 압니다. 그런데 그 기도 안에는 오늘날 교회가 생사를 걸고 다투는 많은 단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교회, 주일, 교파, 성령 체험, 성경무오성, 창조론, 종말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 중심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주제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부활 신앙이 기독교의 중심이 아니라는 뜻도 아닙니다. 후대 교회의 신학적 숙고와 교리적 형성은 가볍게 취급될 수 없습니다.
그 우선순위는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오늘의 양식, 죄의 용서,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는 종교적 제도와 교파적 정체성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를 향합니다.
교회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가를 묻습니다.
교세 확장이나 진영 승리보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뜻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가를 묻습니다.
추상적 종교 언어보다, 실제 인간의 생존과 공동체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개인의 경건만이 아니라 관계, 책임, 용서, 회복의 문제를 함께 묻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이 우선순위에서 얼마나 멀어졌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한국 개신교는 편안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실제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물어보면, 주기도문의 중심과 상당히 다른 목록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규모, 헌금, 건물, 교단 경쟁, 정치적 영향력, 담임목사의 권위, 교세 확장, 내부 결속, 특정 교리 논쟁, 특정 진영과의 결합이 너무 자주 신앙의 중심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한국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작고 성실한 공동체, 조용히 이웃을 섬기는 교회, 이름 없이 약자를 돌보는 신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 전체를 하나의 부정적 이미지로 환원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공적 얼굴이 자주 보여준 것은 겸손한 복음의 증언보다 자기확신과 자기방어, 그리고 자기확장의 욕망이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몇몇 교회가 도덕적으로 실패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문제는 한국 개신교가 자신을 상대화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기나긴 교회사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매우 늦게 형성된 지역적 전통이며, 세계 기독교 전체로 보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자신이 기독교 전체인 것처럼,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인 것처럼, 세상의 마지막 구원자인 것처럼 행동해왔습니다.
작은 가지가 전체 나무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증언이 아니라 오만이 됩니다.
전통을 존중하되, 전통을 복음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전통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배 형식, 신조, 교리, 성경 해석, 직분, 공동체의 규범은 모두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지혜롭지 않습니다. 문제는 전통을 존중하는 것과 전통을 절대화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할 때 생깁니다.
교회는 종종 자신의 교리와 제도와 문화를 복음 그 자체와 혼동합니다. 한국 개신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정한 예배 감각, 특정한 설교 방식, 특정한 정치 성향, 특정한 교회 성장 모델을 마치 성경적 신앙의 유일한 표준인 것처럼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보편성이 아니라 지역적 습관의 절대화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이 지점을 날카롭게 비춥니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의 중심에는 교회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종교 집단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자기 진영의 정당화가 아니라 죄의 용서가 있습니다. 추상적 내세 담론만이 아니라 오늘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보다 크십니다
이 말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자주 잊힙니다.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교단보다 크시고, 어느 신학 체계보다 크시며, 어느 나라의 교회 문화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적 경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권,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속한 작은 전통을 하나님의 전체 뜻과 동일시하지 않는 겸손을 포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도 일하시지만,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양심, 정의, 돌봄, 지혜, 아름다움, 눈물과 책임 속에서도 우리를 깨우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고유성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을 더 깊이 붙들자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일용할 양식, 용서,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중심을 잃지 않을 때, 교회는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고도 더 깊이 기독교적일 수 있습니다.
회복은 본질을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국 개신교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자기주장이 아닙니다. 더 세련된 홍보도 아닙니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도 아닙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정말 예수가 중요하게 여긴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보다 교회의 이름을,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리 진영의 승리를, 오늘의 양식보다 교회의 확장을, 용서보다 정죄를 더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은 교회를 부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한 질문입니다. 본질을 묻지 않는 전통은 쉽게 우상이 됩니다. 자기 위치를 상대화하지 않는 신앙은 쉽게 폭력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교회를 더 크게 말하는 순간,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파하는 조직이 됩니다.
주기도문은 짧습니다. 그러나 그 짧음 안에는 교회가 다시 돌아가야 할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이며, 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인간의 실제 삶, 오늘의 양식, 죄의 용서, 악으로부터의 구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다시 겸손해지려면, 먼저 자신이 전체가 아니라 일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증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임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그 크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곳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곳이어야 합니다.
편집상 주의: 이 글은 존 도미닉 크로산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제제기를 소재로 삼았지만,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연구 전체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대변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Tertia Optio의 관점에서 주기도문이 보여주는 신앙의 우선순위와 한국 개신교의 자기성찰을 연결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