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TIA OPTIO

Politics · Society 01

주어가 바뀌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선관위 논란을 계기로, 사건 자체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과연 같은 기준을 내 편과 상대편 모두에게 적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정치·사회칼럼

양쪽 진영 사이에 하나의 기준선을 세운 추상 삽화
진영이 바뀌어도 기준은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정치적 사건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누가 했는가”라면, 그 사회의 공론장은 이미 상당히 피로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 선관위 논란을 두고도 많은 사람의 반응은 사건의 내용보다 진영의 위치에 따라 먼저 갈리는 듯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로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대 진영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정치 공세로 보입니다. 물론 실제 평가는 사실관계와 절차, 책임의 범위가 확인된 뒤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는 분명합니다.

만약 같은 일이 정권과 진영만 바뀐 채 벌어졌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말을 했을까요?

이 질문은 특정 정당을 공격하기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판단이 원칙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진영의 본능에 끌려가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심 검사에 가깝습니다.

진영논리는 판단을 빠르게 만들지만, 공정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진영은 사람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복잡한 사안을 일일이 따져보지 않아도 어느 편이 옳고 어느 편이 틀린지 빨리 정리해주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편리함 때문에 진영논리는 위험합니다. 그것은 생각을 덜어주는 대신, 분별의 근육도 함께 약하게 만듭니다.

정치인이 자기편의 이권에만 몰두할 때 공공성은 사라집니다. 권력은 국민 전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세력의 생존과 보상을 위한 장치가 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지자들이 그 왜곡을 견제하기보다 정당화할 때 생깁니다. 상대편이 하면 국기문란이고, 내 편이 하면 불가피한 방어가 됩니다. 상대편의 의혹은 확정된 범죄처럼 말하면서, 내 편의 문제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보수와 진보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정치에서 양쪽 모두 반복해온 낡은 습관입니다. 자기편의 잘못에는 관대하고 상대편의 잘못에는 엄격한 태도는, 결국 진실이 아니라 소속을 기준으로 삼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지점도 있습니다. “만약 반대 진영이었다면 너희도 분노했을 것 아니냐”라는 질문은 매우 유용한 자기 점검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사건의 사실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위선을 지적하는 일과,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입니다. 이중잣대는 비판해야 합니다. 동시에 사건 자체도 독립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위선 비판만 있고 사실 검증이 없으면 정치는 냉소가 되고, 사실 검증만 말하면서 기준의 불공정을 외면하면 정치는 기술적 변명으로 변합니다.

01
같은 기준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에게 적용한 기준을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까?

02
사실 확인

분노하기 전에 확인된 사실, 의혹, 해석, 추정을 구분하고 있습니까?

03
절차의 존중

내 편에게 불리할 때도 조사와 책임의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04
악마화의 중지

상대 지지자를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으로 단순화하기 전에, 그들이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 이해하려고 했습니까?

정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정치를 스포츠처럼 소비하는 시대입니다. 내 팀이 이기면 기쁘고, 상대 팀이 실수하면 통쾌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응원전이 아닙니다. 좋은 시민은 자기 생각과 가까운 정당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 판정이 명백히 잘못되었는데도 무조건 자기 팀 편만 든다면, 그는 더 이상 경기의 공정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팀의 승리에만 몰입한 사람이 됩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편의 반칙에는 침묵하고 상대편의 반칙에만 분노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 진영의 승리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앙의 언어로 말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내 편의 불의에는 눈감는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우상화된 소속감입니다.

정치적 성숙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적용한 기준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바람직한 방향은 회색지대에 숨는 것이 아닙니다

Tertia Optio가 말하는 제3의 선택은 양쪽을 적당히 섞자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안에서 가운데에 서겠다는 기계적 중립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영보다 진실을 우선하겠다는 태도입니다. 내 편이 옳을 때는 옳다고 말하되, 내 편이 틀릴 때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관위 논란 같은 공적 사안에서 필요한 태도는 분명합니다. 첫째, 확인 가능한 사실을 최대한 분리해서 보아야 합니다. 둘째, 제도와 절차가 실제로 제대로 작동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셋째, 책임이 있다면 진영과 관계없이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넷째,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근거로 상대 전체를 악마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같은 일이 다른 정권에서 벌어졌을 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사람들의 제도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욕망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최소한의 규칙과 절차를 통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편의 승리를 위해 기준 자체를 바꾸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치인을 감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정치인을 핑계로 우리 자신의 판단 기준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도 감시해야 합니다. 진영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영이 진실보다 앞서는 순간, 시민은 지지자가 되고 정치는 공공의 일이 아니라 부족 간 전쟁이 됩니다.

이번 논란이 어떤 결론으로 정리되든, 이 질문만은 남아야 합니다. 주어가 바뀌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쩌면 바로 그 불편함이 우리가 아직 정치적으로 성숙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편집상 주의: 이 글은 특정 의혹의 사실관계를 확정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선관위 논란을 계기로 진영논리, 이중잣대, 공적 판단의 기준을 점검하기 위한 칼럼입니다. 구체적 책임 판단은 검증된 사실과 절차에 따라 별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