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TIA OPTIO

Faith · Theology 03

하나님을 높이면 인간은 작아져야 하는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서로 적대적인 두 선택지로 이해해온 오래된 습관을 다시 묻습니다.

신앙·신학칼럼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인간 존엄의 관계를 보여주는 추상 삽화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이 인간을 지우는 순간,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이 인간을 지우는 순간,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개신교에서 ‘인본주의’라는 말은 종종 하나의 사상을 설명하는 용어라기보다, 상대의 생각을 끝내기 위한 판정처럼 사용됩니다.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중요하게 말하면 인본주의, 인권과 민주주의와 공공선을 강조하면 인본주의, 심리학이나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자고 해도 인본주의, 인간의 고통과 현실을 먼저 살피자고 말해도 인본주의라는 이름이 붙곤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이 붙는 순간, 그 주장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더 이상 살펴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취급됩니다.

반대편에는 ‘신본주의’가 놓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인간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경고에는 분명 귀 기울일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그다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둔다는 말이 인간의 질문과 양심과 존엄을 작게 만드는 데 사용될 때, 그 말은 정말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신본주의는 실제로 누구를 중심에 놓고 있습니까

신본주의라는 말의 뜻대로라면 그 중심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먼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상대화해야 합니다. 교회도, 교단도, 목회자도, 신학 체계도, 특정한 성경 해석도, 심지어 성경조차도 하나님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조직보다 크시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어떤 종교 언어보다도 크십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신본주의는 때때로 하나님보다 종교 제도와 지도자의 권위를 더 강하게 지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질문을 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으로 여기고, 목회자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피해자의 고통보다 교회의 명예를 먼저 걱정하고, 상식적인 문제 제기를 세속적 가치에 물든 태도로 밀어냅니다.

그것은 신본주의라기보다 교회 중심주의, 권위 중심주의, 또는 종교 제도의 자기보호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둔다면 교회는 자신을 더 크게 말하기보다 더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해석과 제도와 욕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인간을 상대화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종교의 욕망을 상대화합니다.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낮추는 일이 됩니까

성경의 첫 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스스로 생겨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존중하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높아지려면 인간이 비참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밀어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에게 한 일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눈앞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신앙은 온전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성육신의 고백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성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 양심, 자유, 이성, 고통과 존엄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를 무조건 ‘인본주의’라며 배척하는 것은 기독교적으로도 이상한 일이 됩니다.

다만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긍정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소중하지만, 그것이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워버리는 권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성은 귀하지만, 자신의 한계와 편견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은 또 하나의 독단이 됩니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삶을 크게 개선했지만, 인간의 능력이 커진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과 도덕성까지 자동으로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존엄하면서도 불완전합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자기 이익에는 관대하고, 자유를 주장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의 자유를 빼앗기도 합니다. 자신의 판단을 이성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욕망과 진영과 편견에 끌려갈 때도 많습니다.

기독교가 인본주의에 던질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며, 인간은 자신을 넘어선 진리와 타인과 자연과 미래 세대 앞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신학 역시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말한다면서 다른 사람의 양심과 권리를 빼앗고,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인간 지도자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교만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인간의 교만을 보호하는 일이 됩니다.

이름보다 열매를 물어야 합니다

신본주의인가 인본주의인가를 먼저 고르기보다, 그 사상과 신앙이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 물어야 합니다.

01
누가 높아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와 지도자와 진영의 권력이 높아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02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다루어집니까

인간을 중요하게 말하면서도 약한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인간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03
질문과 양심은 허용됩니까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사고를 멈추게 하거나, 이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종교적 질문을 미신으로 조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04
그 결과는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됩니까

그 신앙과 사상이 사람을 더 정직하고 책임감 있고 자비롭게 만들며, 공동체를 더 안전하고 공정하게 이끌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는 신본주의라는 이름도, 인본주의라는 이름도 자동으로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무엇이 절대화되고, 누가 보호받으며, 어떤 열매가 맺히는가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도, 인간 없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Tertia Optio가 찾는 제3의 선택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절반씩 섞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적당히 중간을 고르는 기계적 타협도 아닙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절대화와 인간 없는 종교의 절대화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을 모든 의미의 최종 기준으로 세우다가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제어할 더 큰 기준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 없는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창조하고 사랑하신 인간의 고통과 존엄을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함은 하나님과 인간 중 하나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초월과 현실, 신앙과 책임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만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인간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책임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존엄과 고통에 대한 책임도 깊어져야 합니다. 인간을 존중할수록 인간의 한계와 책임 역시 더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개신교에 필요한 것은 인간을 더 작게 만드는 강한 구호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인간을 지배하려는 종교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인간 모두의 자리를 다시 묻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 역시 하나님을 밀어내야만 확보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하나님을 향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더 깊이 돌보게 할 때, 우리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낡은 대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상 주의: 이 글은 인본주의 전체를 옹호하거나 신본주의를 부정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두 용어가 지나치게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사용되는 방식을 점검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인간 존엄에 대한 책임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묻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