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높인다는 말이 사람을 작게 만드는 데 쓰이는 장면을 종종 봅니다. 그때 우리가 높이고 있는 분은 정말 하나님일까요.
한국 개신교에서 ‘인본주의’라는 말은 종종 하나의 사상을 설명하는 용어보다 상대의 말을 끝내는 판정에 가깝게 쓰입니다.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중요하게 말해도, 인권과 민주주의와 공공선을 이야기해도 같은 딱지가 붙습니다. 심리학이나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보자는 제안, 고통받는 사람의 현실부터 살피자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인본주의’로 분류되고 나면 그 주장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좀처럼 검토되지 않습니다.
반대편에는 ‘신본주의’가 놓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인간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경고에는 분명 귀 기울일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중심에 둔다는 말이 사람의 질문과 양심, 존엄을 눌러버리는 데 사용된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그 말은 여전히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신본주의의 중심에는 정말 하나님이 있습니까
말뜻 그대로라면 신본주의의 중심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먼저 인간이 만든 제도와 해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회도, 교단도, 목회자도, 신학 체계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더라도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까지 무오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조직보다 크시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종교 언어보다도 크십니다.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질문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목회자의 판단에 대한 이의는 믿음의 부족으로 읽힙니다. 피해자의 고통보다 교회의 평판을 먼저 걱정하고, 상식적인 문제 제기는 세속적 가치에 물든 태도로 밀어냅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 보호되는 것은 종교 제도와 지도자의 권위인 셈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둔다면 교회는 자신을 더 크게 말하기보다 더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해석과 제도와 욕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어쩌면 인간 일반의 교만보다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종교 자신의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을 낮추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첫 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스스로 생겨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존중하는 일과 하나님을 높이는 일은 서로 자리를 빼앗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높아지기 위해 인간이 비참해져야 할 이유도 없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밀어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에게 한 일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눈앞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신앙은 온전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성육신의 고백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성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신앙을 고백하면서 인간의 생명과 양심, 자유와 이성, 고통과 존엄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를 무조건 ‘인본주의’라며 밀어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긍정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소중하지만, 그것이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워버리는 권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성은 귀하지만, 자신의 한계와 편견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은 또 하나의 독단이 됩니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삶을 크게 개선했지만, 인간의 능력이 커진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과 도덕성까지 자동으로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존엄하면서도 불완전합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자기 이익에는 관대하고, 자유를 주장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의 자유를 빼앗기도 합니다. 자신의 판단을 이성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욕망과 진영과 편견에 끌려갈 때도 많습니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는 인본주의에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니며, 욕망은 진리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넘어선 진리와 타인, 자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 앞에서도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신학 역시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말한다면서 다른 사람의 양심과 권리를 빼앗고,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인간 지도자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교만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인간의 교만을 보호하는 일이 됩니다.
이름보다 열매를 물어야 합니다
신본주의인가 인본주의인가를 먼저 고르기보다, 그 사상과 신앙이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와 지도자와 진영의 권력이 높아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을 중요하게 말하면서도 약한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인간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사고를 멈추게 하거나, 이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종교적 질문을 미신으로 조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신앙과 사상이 사람을 더 정직하고 책임감 있고 자비롭게 만들며, 공동체를 더 안전하고 공정하게 이끌고 있습니까.
이 네 가지 질문에 답할 때는 신본주의나 인본주의라는 이름만으로 점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절대화되고 있는지, 누가 보호받는지, 실제로 어떤 열매가 남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도, 인간 없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Tertia Optio가 말하는 제3의 선택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절반씩 섞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 지점을 계산하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절대화와 인간 없는 종교의 절대화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을 모든 의미의 최종 기준으로 세우다가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제어할 더 큰 기준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 없는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창조하고 사랑하신 인간의 고통과 존엄을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함은 하나님과 인간 가운데 하나를 지워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고, 초월에 대한 믿음이 현실의 책임과 만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깊어진다면 인간의 존엄과 고통에 대한 책임도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인간을 존중한다는 말 역시 인간의 한계와 책임을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더 단단해집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어떻게 나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세상의 주인으로 여기며 타인과 자연과 미래에 대한 책임을 잊는 순간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종교도 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높인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고, 그 고통을 외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안다고 자부하면서 사람을 울게 만드는 신앙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하지 못해도 아픈 사람 곁에 조용히 앉아주는 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복음의 방향에 더 가까운지는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인본주의’라는 단어와 싸우기보다 사람을 살리고 상처 입은 삶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한국 개신교에 필요한 것은 인간을 더 작게 만드는 강한 구호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인간을 지배하려는 종교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인간 모두의 자리를 다시 묻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 역시 하나님을 밀어내야만 확보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짓밟으면서 하나님을 높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다는 고백은 눈앞의 한 사람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습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낡은 대립을 넘어서는 길도 거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예수께서는 작은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을 엄중히 경고하셨고(마태복음 18:6), 서로 사랑하는 삶을 제자의 표지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34-35). 세 본문을 함께 읽으면 이 글의 기준도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진실성은 결국 가장 약한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편집상 주의: 이 글은 인본주의 전체를 옹호하거나 신본주의를 부정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두 용어가 지나치게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사용되는 방식을 점검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인간 존엄에 대한 책임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묻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