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평가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요.
‘영성’이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려 하면 쉽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일까요. 예배에 충실한 것일까요.
영성을 인성과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인성은 그저 성격이 유순하거나 예의가 바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조직 안에서 힘을 사용하는 태도, 사건을 판단하는 기준, 돈과 사물을 다루는 습관, 자연을 대하는 책임까지 포함합니다. 영성은 이처럼 한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와 행동 전체에서 드러납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 예배와 깊은 종교적 체험은 그 삶의 중요한 일부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삶의 나머지 부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별도로 물어야 합니다.
영성과 인성을 정말 나눌 수 있을까요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고 성경을 일 년에 여러 번 통독하면서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모욕한다면, 그 기도 시간과 통독 횟수만으로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이웃에게 어떻게 느껴질까요.
기도, 성경 읽기, 예배, 봉사, 헌금은 모두 의미 있는 신앙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느 순간 영성을 측정하는 실적처럼 사용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 시간이 길다고 꼭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고,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꼭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성찰과 연결되지 않은 종교적 훈련은 자신의 편견과 확신을 강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찾아내는 눈은 예리해지는데, 자신이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말에는 점점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영성을 인성과 연결한다고 해서 신앙을 좋은 성격이나 사회적 평판으로 환산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늘 웃고 갈등을 피하는 사람이 반드시 더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피해자의 편에 서고, 익숙한 질서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 사랑의 실천일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가보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서 타인의 존엄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을 공범으로 만들 때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의 판단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일입니다.
“나는 저 사람이 싫다”와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후자는 자신의 감정과 편견에 하나님의 권위를 더합니다. 상대는 이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잘못한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분노를 의로운 분노라고 부르고,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판단에 신앙이라는 간판을 붙이면 기독교의 핵심인 이웃사랑이 들어갈 자리는 좁아집니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살피기보다 상대의 믿음을 의심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정당화의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셈입니다.
물론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근거를 들어 설명하는 일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의 인격과 신앙 전체를 판결하는 일은 구분해야 합니다.
이 경계는 종교적 위선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누군가의 오만을 지적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모욕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을 너무 쉽게 동일시하지 않는 일, 이 불편한 절제가 신앙인에게 먼저 필요할지 모릅니다.
영성은 관계 속에서 확인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은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순을 짚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 역시 사랑과 오래 참음, 자비와 온유, 절제처럼 삶과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품을 포함합니다. 기독교가 중요하게 여기는 내적 변화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의식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화려하게 공경하면서 밖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겪는 이를 외면하는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존 웨슬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말과 행동의 친절함, 오래 참음, 성급한 판단을 삼가는 태도로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마태복음 강해」 제50편, 웨슬리, 「On Love」
헨리 나우웬의 삶과 글 역시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나우웬은 자신의 불안과 연약함을 숨기지 않았으며, 지적장애인 공동체 라르슈 데이브레이크에서 목회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과 글에서 연약함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영성을 흠 없는 사람의 자격처럼 생각하던 시선을 돌아보게 합니다. Henri Nouwen Society, 생애 소개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을 받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살아갈 자리를 내어주는 일일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은 개인뿐 아니라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존 셸비 스퐁은 교회의 미래에 관한 한 문답에서 자신이 알던 교회가 죽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나는 것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에클레시아’라고 부른 공동체는 부족적 정체성과 편견, 성별에 따른 우열, 나아가 종교적 경계까지 넘어서는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는 어제의 교회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일보다 새로운 기독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스퐁 문답 재게시, 「Ekklesia …」
이것을 모든 신앙 공동체가 불필요하다는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익숙한 형태와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삶을 구분해서 생각하게 하는 문제 제기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제도를 지키는 것과 예수가 보여준 삶의 방향을 따르는 것은 언제나 같은 일일까요. 예수는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질문에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답했습니다(마태복음 22:37–40). 교회를 세우고 지키는 일의 의미 역시 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언젠가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교회가 사라진다 해도, 누군가 예수를 따라 사람을 사랑하고 약한 이를 돌본다면 그 삶에서 예수의 정신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교회의 지속을 바라는 마음에도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묻는 질문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은 뒤에도 책임은 남습니다
그렇다고 삶의 결과만으로 영성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정성을 다해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수 있고, 최선을 다한 돌봄이 원하는 결말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선택과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조건까지 한 사람의 믿음이나 인성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모두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 그 결과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의도로 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내 뜻은 좋았다”는 설명만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 전달되었는지 듣고,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사과하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의 문제 제기를 충성심 부족으로 몰아붙이는지, 불편하더라도 그 내용부터 살피는지에 따라 우리가 말하는 책임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사물과 자연을 대할 때도 당장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과 다음 세대가 감당할 비용을 쉽게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을 수 있습니다.
영성을 묻는 자리는 성공한 결과만이 아닙니다. 뜻대로 되지 않은 뒤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책임지는지도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포함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합니다(마태복음 5:13–16).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할 자리는 세상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경계와 비난의 대상으로만 대한다면, 정작 그 안에서 사랑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부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중요한 이유를 다시 묻자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는데 더 교만해졌다면, 성경을 많이 읽었는데 타인을 더 쉽게 정죄한다면, 예배를 오래 드렸는데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해졌다면 그동안 열심으로 해온 경건의 훈련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기도가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게 하고, 성경 읽기가 익숙한 편견을 흔들며, 예배가 이웃의 고통에 귀 기울이게 한다면 그 훈련은 삶 속에서 의미를 얻습니다.
신앙생활의 열매가 즉시 완벽한 성품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오래된 습관으로 돌아가고, 가까운 사람에게 더 쉽게 상처를 주며, 아는 만큼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영성에 점수를 매기는 표보다 자신에게 되돌려 묻는 질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조금 더 잘 듣게 되었는가.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잘못했을 때 사과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말하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신앙이라면, 그 가까움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인격과 삶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특별한 자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영성은 의외로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힘을 가졌을 때 절제하는 것.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자신의 믿음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이 만나는 사람과 조직과 사회와 자연을 조금 더 책임 있게 대하는 것.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라면 충분히 영적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영성이란 하나님에 관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세상과 그 안에서 만나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출처와 주석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복음 강해」 제50편, 4–5절. 본문은 직접 인용이 아닌 요지 정리입니다.
존 웨슬리, 설교 139 「On Love」, II. 본문은 직접 인용이 아닌 요지 정리입니다.
Henri Nouwen Society, About Henri Nouwen. 나우웬의 생애와 연약함에 관한 설명 근거이며, 이 글의 영성에 관한 정의를 그의 주장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 셸비 스퐁, 교회의 미래에 관한 문답. Frank D. Myers가 The Lucas Countyan에 2019년 2월 21일 재게시한 「Ekklesia …」에서 확인했습니다. 재게시자는 Progressing Spirit에서 전달된 과거 문답이라고 소개하며 원문 발표일을 2003년 10월 15일로 표기합니다. 본문은 이 재게시문의 요약이며, 원 게재본을 독립적으로 확인하거나 특정 저서에서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뒤이어 제기하는 교회 제도에 관한 질문은 이 글의 해석과 질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