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TIA OPTIO

Faith · Theology 02

예수가 가르친 기도 앞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

주기도문은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교회가 놓쳐서는 안 될 우선순위를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신앙·신학칼럼

주기도문의 핵심 우선순위를 보여주는 삽화
기도의 중심이 흐려지면, 교회의 중심도 함께 흐려집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주기도문을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이상한 기도”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 결론보다 그가 질문을 꺼내는 방식에 더 눈길이 갑니다.

그가 주목한 사실은 단순합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기도문을 알고 또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기도에는 오늘날 교회가 그토록 치열하게 다투는 말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교회, 주일, 교파, 성령 체험, 성경무오성, 창조론, 종말론, 천국과 지옥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이 기도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 주제들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부활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고 해서 부활 신앙이 기독교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 이어진 교회의 신학적 숙고와 교리 형성을 몇 문장으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독교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우선순위를 보여줍니다.

그 우선순위는 놀랄 만큼 소박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 오늘의 양식, 죄의 용서,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는 종교 제도나 교파의 정체성에 앞서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 삶을 향합니다.

01
하나님의 이름

교회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가를 묻습니다.

02
하나님의 나라와 뜻

교세 확장이나 진영 승리보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뜻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가를 묻습니다.

03
오늘의 양식

추상적 종교 언어보다, 실제 인간의 생존과 공동체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04
죄의 용서와 악에서의 구원

개인의 경건만이 아니라 관계, 책임, 용서, 회복의 문제를 함께 묻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이 우선순위에서 얼마나 멀어졌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한국 개신교는 그리 편안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실제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돌아보면, 주기도문과는 꽤 다른 목록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규모와 헌금, 건물, 교단 경쟁, 정치적 영향력, 담임목사의 권위, 내부 결속과 특정 진영과의 결합이 때로는 신앙의 중심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모든 한국 교회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작지만 성실한 공동체가 있고, 이웃을 조용히 섬기는 교회와 이름 없이 약자를 돌보는 신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들을 지운 채 한국 개신교 전체를 하나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묶는 일 역시 공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대중 앞에 드러난 한국 개신교의 얼굴에서는 겸손한 복음의 증언보다 자기확신과 자기방어, 성장에 대한 욕망이 더 자주 보였습니다.

몇몇 교회의 도덕적 실패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더 뿌리 깊은 문제는 한국 개신교가 자신을 역사 속에서 상대화하는 법을 잊었다는 데 있습니다. 긴 교회사를 놓고 보면 한국 개신교는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지역 전통이며, 세계 기독교 안에서도 작은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때때로 자신이 기독교 전체인 듯,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라도 되는 듯 행동해왔습니다.

작은 가지가 전체 나무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증언이 아니라 오만이 됩니다.

전통을 존중하되, 전통을 복음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전통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배 형식과 신조, 교리와 성경 해석, 직분과 공동체의 규범은 모두 역사 속에서 다듬어졌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 역시 지혜롭지 않습니다. 다만 전통을 존중하는 일과 절대화하는 일은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에게 익숙한 교리와 제도, 문화를 복음 그 자체로 착각하곤 합니다. 한국 개신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정한 예배와 설교 방식, 정치 성향, 성장 모델을 성경적 신앙의 유일한 표준처럼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편적 복음이라고 믿는 것이 실은 한 시대와 지역의 습관일 가능성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이 지점을 날카롭게 비춥니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의 중심에는 교회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종교 집단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자기 진영의 정당화가 아니라 죄의 용서가 있습니다. 추상적 내세 담론만이 아니라 오늘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보다 크십니다

당연한 말인데도 자주 잊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보다 크십니다. 어느 교단과 신학 체계, 어느 나라의 교회 문화보다도 크십니다. 인간이 그어놓은 종교적 경계 안에 하나님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느 한 시대나 민족, 문화권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일에는 내가 속한 전통을 하나님의 뜻 전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겸손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일하시며, 때로는 교회 밖에서 만나는 양심과 정의, 돌봄과 지혜를 통해서도 교회를 깨우십니다.

기독교의 고유성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 일용할 양식과 용서,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중심을 더 깊이 붙들자는 말입니다. 그 중심을 놓치지 않는 교회는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고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깊이 기독교적일 수 있습니다.

회복은 본질을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국 개신교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자기주장이나 세련된 홍보,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가 중요하게 여긴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보다 교회의 이름을,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리 진영의 승리를, 오늘의 양식보다 교회의 확장을, 용서보다 정죄를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교회다움을 되찾기를 바라기 때문에 묻습니다. 본질을 묻지 않는 전통은 우상이 되기 쉽고, 자기 위치를 돌아보지 않는 신앙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교회를 더 크게 말하는 순간, 교회는 복음보다 자기 자신을 전파하는 조직이 됩니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교회가 돌아갈 방향은 분명하게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인간의 실제 삶, 오늘의 양식, 죄의 용서와 악으로부터의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다시 겸손해지려면 자신이 전체가 아니라 일부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경계보다 크시며 모든 피조세계를 품으십니다. 교회는 그 하나님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곳이어야 합니다.

편집상 주의: 이 글은 존 도미닉 크로산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제제기를 소재로 삼았지만,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연구 전체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대변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Tertia Optio의 관점에서 주기도문이 보여주는 신앙의 우선순위와 한국 개신교의 자기성찰을 연결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