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사건을 접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누가 했는가”를 먼저 묻게 된다면, 그 사회의 공론장은 이미 꽤 지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 선관위 논란을 둘러싼 반응도 사건의 내용보다 각자의 진영에 따라 먼저 갈리는 듯합니다.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라고 보고, 다른 누군가는 상대 진영이 만들어낸 정치 공세라고 여깁니다. 실제 평가는 사실관계와 절차, 책임의 범위가 확인된 뒤에 내려야 합니다. 그 판단과 별개로 우리 자신에게 먼저 던져볼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특정 정당을 몰아세우자는 질문은 아닙니다. 내 판단이 원칙에 서 있는지, 진영의 본능을 따라가고 있는지 살피는 간단한 자기 점검에 가깝습니다.
진영논리는 판단을 빠르게 만들지만, 공정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진영은 묘한 안도감을 줍니다. 복잡한 사안을 일일이 살피지 않아도 어느 쪽이 옳은지 금세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편리함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판단을 맡기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스스로 분별하는 힘은 약해집니다.
정치인이 자기편의 이권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권력은 국민 전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세력의 생존과 보상을 위한 장치가 됩니다. 지지자마저 이를 견제하기보다 변호하면 왜곡은 더 깊어집니다. 상대편이 하면 국기문란이고, 내 편이 하면 불가피한 방어가 됩니다. 상대편의 의혹은 확정된 범죄처럼 다루면서도 내 편의 문제 앞에서는 갑자기 신중해집니다.
어느 한쪽만의 버릇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 정치의 보수와 진보 모두가 되풀이해온 오래된 습관입니다. 자기편의 잘못에는 관대하고 상대편의 잘못에만 엄격하다면, 판단의 기준은 이미 진실이 아니라 소속이 된 셈이지요.
“상대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반대 진영이었다면 당신들도 분노했을 것”이라는 말로 논의를 끝낼 수는 없습니다. 이 질문은 유용한 자기 점검이지만, 현재 사건의 사실 판단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상대의 위선을 지적하는 일과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입니다. 이중잣대도 비판해야 하고 사건 자체도 독립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위선만 들춰내고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냉소만 남습니다. 반대로 사실 검증을 내세우며 잣대의 불공정을 외면하면 절차는 편리한 변명으로 쓰이게 됩니다.
참사 앞에서 기준은 더 엄격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선거관리위원회나 특정 정당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처럼 많은 생명이 희생된 사건 앞에서는 오히려 더 엄격해야 합니다. 참사를 어느 정권이나 진영의 선전 문구로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애도하고, 구조적 원인과 행정의 책임, 현장의 판단과 제도의 결함을 차분히 확인해야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한국 사회는 구조 실패와 국가 책임을 물었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군중 압사 참사가 벌어졌을 때도, 우리는 안전 관리와 사전 대응, 현장 지휘의 문제를 물어야 했습니다. 2024년 12월 29일 무안국제공항에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인 규명은 조종, 항공기 상태, 공항 시설, 관제, 조류 충돌 가능성, 활주로 끝 구조물 등 확인 가능한 요소를 차분히 살피는 일이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참사 앞에서도 진영은 빠르게 작동합니다. 싫어하는 정권에서 벌어진 참사는 곧바로 국가의 죄가 되고, 지지하는 정권에서 벌어진 참사는 불가항력이나 현장의 실수로 축소되기 쉽습니다. 상대 진영의 비판은 선동이라 부르고 내 진영의 비판은 정의로운 추궁이라 부릅니다.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서조차 기준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애도보다 참사의 정치적 소유권을 다투는 일에 가까울 것입니다.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다만 분노의 크기가 아니라 확인된 사실, 제도의 작동 여부, 예견하고 피할 수 있었는지, 지휘와 사후 대응은 적절했는지를 기준으로 물어야 합니다. 어느 정부에서 일어났든 질문은 같아야 합니다. 무엇을 알 수 있었고 무엇을 막을 수 있었는가. 권한을 가진 사람은 누구였으며 그 권한은 제대로 쓰였는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에게 적용한 기준을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까?
분노하기 전에 확인된 사실, 의혹, 해석, 추정을 구분하고 있습니까?
내 편에게 불리할 때도 조사와 책임의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상대 지지자를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으로 단순화하기 전에, 그들이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 이해하려고 했습니까?
정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정치를 스포츠처럼 소비하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내 팀이 이기면 기쁘고 상대 팀이 실수하면 통쾌합니다. 물론 시민은 자기 생각과 가까운 정당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명백히 잘못된 판정 앞에서도 자기 팀만 감싼다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경기의 공정성보다 팀의 승리일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응원전만으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편의 반칙에는 침묵하고 상대편의 반칙에만 분노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 진영의 승리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앙의 언어로 말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내 편의 불의에는 눈감는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우상화된 소속감입니다.
정치적 성숙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적용한 기준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바람직한 방향은 회색지대에 숨는 것이 아닙니다
Tertia Optio가 말하는 제3의 선택은 양쪽을 적당히 섞자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안에서 가운데에 서겠다는 기계적 중립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영보다 진실을 우선하겠다는 태도입니다. 내 편이 옳을 때는 옳다고 말하되, 내 편이 틀릴 때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선관위 논란 같은 공적 사안을 대할 때도 이 원칙이면 충분합니다. 확인된 사실과 의혹을 구분하고, 제도와 절차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살펴야 합니다. 책임이 확인되면 진영과 관계없이 물어야 하며, 확인되지 않은 추정으로 상대 전체를 악마화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같은 일이 다른 정권에서 벌어져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사람들의 제도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욕망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최소한의 규칙과 절차를 통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편의 승리를 위해 기준 자체를 바꾸는 사람입니다.
정치인을 감시하는 일만큼 우리 자신의 판단 기준을 살피는 일도 필요합니다. 진영은 정치에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영이 진실보다 앞서는 순간 시민은 열성 지지자로만 남고, 정치는 공공의 일에서 편을 가르는 싸움으로 변합니다.
이번 논란이 어떤 결론으로 정리되든, 이 질문만은 남아야 합니다. 주어가 바뀌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쩌면 바로 그 불편함이 우리가 아직 정치적으로 성숙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편집상 주의: 이 글은 특정 의혹의 사실관계를 확정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선관위 논란을 계기로 진영논리, 이중잣대, 공적 판단의 기준을 점검하기 위한 칼럼입니다. 구체적 책임 판단은 검증된 사실과 절차에 따라 별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